[칼럼] 겨울을 건너는 기술, 관계를 엮는 언어: ‘김장문화’라는 유산

김은희 원스팜 대표이사 / 전통요리연구가 / 2025-11-04 14:00:11
▲김은희 원스팜 대표이사 / 전통요리연구가

[맘스커리어 = 김은희 원스팜 대표이사 / 전통요리연구가] 안녕하세요? 전통음식을 너무나 사랑해서 전통음식을 널리 알리고 있는 김은희입니다.


양력 11월이면 본격적으로 김장을 담기 시작하는데요.. 오늘은 우리나라 김장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유네스코가 2013년 ‘인류무형문화유산’(Representative List)으로 등재한 우리나라의 김장문화는 단순한 음식 만들기를 넘어, 계절을 건너는 기술이자 공동체를 작동시키는 사회적 장치입니다. 이름 그대로 김장(越冬備菜)은 겨울을 대비해 자연의 시간을 저장하는 일이며, 그 과정 자체가 삶의 질서를 세웁니다. 절기에 맞춰 배추와 무, 고춧가루와 천일염, 젓갈과 마늘·파가 모이면, 가정이라는 작은 주방은 곧 마을과 도시를 잇는 커다란 부엌으로 확장됩니다.


김장은 ‘시간을 다루는 요리’입니다. 소금과 온도, 통풍과 숙성 기간을 조율하며, 발효라는 보이지 않는 생명활동과 협업합니다. 김장독이 땅속에 묻히건, 아파트 베란다의 김치냉장고로 옮겨가건, 김장은 “나중을 위해 지금을 투자하는” 한국식 시간 관리의 문화적 표현입니다. 덕분에 겨울 내내 밥상은 안정되고, 식재료의 수명은 길어지며, 풍미는 계절을 통과하며 깊어집니다.


김장은 또한 ‘관계의 기술’입니다. 장터에서 김장거리를 공동구매하고, 이웃과 품앗이를 하며, 완성된 김치를 나눕니다. 집집마다 레시피는 다르지만, 서로의 집으로 옮겨 다니는 손과 어깨의 노동이 “손맛”이라는 이름으로 표준화됩니다. 이 과정은 가족을 넘어 관계망을 재조정하고, 도움과 보답의 기억을 업데이트합니다. 결국 김장은 식량을 저장하는 동시에 신뢰를 저장합니다.


이 문화가 ‘무형’으로 호명되는 까닭은 결과물인 김치보다 과정의 지식, 즉 배추절임의 감(鹽度와 시간), 양념 배합의 요령, 공동의 일손을 부르는 예절과 역할 분담 같은 ‘살아 있는 운영체계’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 등재는 그 운영체계를 인류 보편의 자산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고, 이는 “한국만의 것”을 넘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지속가능성의 문법”으로서 가치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김장은 지역성과 다양성의 박물관이기도 합니다. 동해안은 젓갈의 결이 다르고, 내륙은 젓을 아끼는 대신 마늘과 생강의 비율을 달리합니다. 어떤 집은 무채를 넉넉히 넣고, 어떤 집은 굴과 낙지를 더합니다. 이렇게 축적된 수많은 변주가 “표준 김치”라는 단일한 정답을 거부하고, ‘다양성의 평균’이라는 한국적 합의를 만들어냅니다. 김장은 표준화된 공장 레시피가 아니라, 조정 가능한 지역 알고리즘입니다.


도시는 김장을 변화시켰습니다. 마당과 장독대가 사라진 자리를 공동주택의 베란다, 아파트 단지의 공용 공간, 구청의 ‘나눔 김장’ 행사, 푸드뱅크와 자원봉사 네트워크가 채웁니다. 전통의 형식이 바뀌어도 핵심은 유지됩니다. 함께 계획하고, 함께 담그고, 함께 나눈다는 원리는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김장은 낯선 땅의 시장과 기후를 읽어 현지 재료로 다시 조합되며, ‘한국적’이라는 뜻을 세계적 실험으로 확장합니다.


물론 과제도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배추 작황과 소금, 젓갈 원재료 수급이 흔들리면 김장의 경제성과 맛의 기억이 동시에 위협받습니다. 1인 가구의 증가는 대량 담그기의 효용을 낮추고, 잉여의 발생과 음식물 쓰레기 문제를 낳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화는 응답합니다. 소분 김장, 동네 공유부엌, 공동구매와 공동저장, 푸드뱅크 연계 나눔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는 중입니다. 비건 김치나 저염 레시피 같은 건강·윤리의 요구도 김장 알고리즘 안으로 흡수되고 있습니다.


김장문화 보존의 핵심은 ‘박제’가 아니라 ‘가동’입니다. 기록하고 가르치되, 매년 현실에 맞춰 다시 설계하는 능력이 전승입니다. 학교 교과에서 김장 프로젝트가 팀워크 교육이 되고, 지역축제가 이주민과 노인을 잇는 돌봄 플랫폼이 될 때, 김장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합니다. 유네스코 등재는 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이 제도를 나와 우리, 지역과 세계가 연결되는 공적 실천으로 유지하라는 약속 말입니다.


결국 김장은 한국인의 삶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계절을 읽고 자원을 아끼며, 공동의 식탁을 상상하고 책임을 나누는 태도. 김장독 하나를 묻는 일은 작은 사회를 땅속에 심는 일과 비슷합니다. 뚜껑을 여는 겨울날, 우리는 저장된 식량과 함께 서로를 초대합니다. 그 초대가 지속되는 한, 김장문화는 유산이 아니라 내일을 준비하는 기술로, 한국을 넘어 인류의 공통 언어로 남을 것입니다.

 

맘스커리어 / 김은희 원스팜 대표이사 / 전통요리연구가 ehk0408@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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