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C.J 워커(사라 브리드러브, 1867~1919)
[맘스커리어=최영하 기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중대한 순간에 존재감을 보였던 여성을 조명합니다. 시대의 억압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놨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사례들을 소개하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미국의 흑인 여성 사업가 '마담 C.J 워커'
후대의 유색인종 여성들에게 긍지와 큰 자신감을
▲마담 C.J 워커[사진=wikipedia] |
20세기 초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은 극도로 어려웠다. 그들은 대부분 가정의 하인이나 농장과 공장의 노동자로 일했다. 1867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에서 태어난 사라 브리드러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노예 출신이었고 미시시피강 유역의 목화밭에서 평생 일을 하며 살아왔다.
사라는 5살 때부터 가족들과 목화를 따고 백인들을 위해 빨래를 했다. 불행히도 그가 7살 때 부모님이 황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언니와 함께 한순간에 고아가 됐다. 사라는 불과 14살의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딸을 낳고 2년이 지나지 않아 남편도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그렇게 연이은 비극이 찾아왔지만 사라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이튼루이스로 이주해 빨래 일을 하면서 밤에는 공부에 매달렸다.
삶의 역경은 사라에게 큰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를 선사했다. 그러나 탈모는 그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흑인 특유의 지나치게 건조하고 잘 끊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 문제를 해결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사라는 그간 해온 빨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바셀린과 향료를 합성해 모발과 두피를 보호하는 제품을 개발해냈다. 낮에는 백인 가정에서 부엌일을 하면서 밤에는 제품 개발에 매달린 결과였다. 몇 차례의 실패를 거쳐 완성된 제품은 새 머리카락이 돋는 데 도움을 주고 지독한 곱슬머리도 부드럽게 해줬다.
효능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성공가도에 올라선 사라는 제품을 판매할 여성조직을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미용학원을 열어 에이전트를 육성해 전국 판매망을 구축했다. 나아가 미국을 넘어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중남미 국가들에서도 그의 제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의 사업은 전국적으로 에이전트가 3000명이나 될 정도로 급속히 커졌다. 미용학원에 갈 수 없는 흑인 여성들은 통신교육으로 워커의 제품 사용법을 배웠고, 그렇게 수많은 흑인 여성들이 사라의 제품을 판매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을 살 수 있었다. 많은 유색인종 여성들이 빨래터와 백인 가정을 떠나 즐겁고 돈을 버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사라는 백만장자가 되고 전국에 유명세를 떨쳤지만 오만해지지 않았다. 자신의 재산을 쾌척해 흑인의 권익향상을 위해 싸우는 전국 유색인종 발전협회와 교회, 문화 단체 등에 많은 도움을 줬다. 흑인 예술가들과 작가들도 지원했고, 흑인들을 상대로 한 폭력을 막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7년에는 흑인 여성 단체 회원들과 함께 워싱턴으로 달려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만나 흑인들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는 연방법을 제정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불행히도 사라는 51세 나이에 신장 기능 문제로 숨을 거뒀다. 하지만 그가 구축한 사업체는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그의 유지를 받들어 사회에 기여하는 사업을 해 나갔다. 또한 그의 성공은 후대의 유색인종 여성들에게 긍지와 함께 큰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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