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여성들] 이사도라 덩컨
[맘스커리어=최영하 기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중대한 순간에 존재감을 보였던 여성을 조명합니다. 시대의 억압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놨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사례들을 소개하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속박을 벗고 자유를 갈망한 맨발의 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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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덩컨[사진=위키백과] |
1878년 5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산한 은행가의 딸로 태어난 이사도라 덩컨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생계를 돕느라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잠시 다녔던 학교의 강한 규율은 그에게 맞지 않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성정은 이때부터 구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춤을 유독 좋아했던 그는 독학으로 무용을 배웠는데, 이미 존재하던 흐름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에 큰 흥미를 느꼈다. 획일적인 구조를 탈피해 자신만의 의지와 감정을 중요시한 니체 철학,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사도라는 ‘자유 무용’이라는 독특한 무용을 창시했다. 그리스 스타일의 긴 옷을 입고 맨발로 무대에 오르며 전통적인 무용에 도전했다. 사실은 그도 처음에는 발레를 배웠지만, 세련됨 이면의 제약이 많은 고전 발레의 인공적인 기법에 거부감을 느꼈다. 이는 자유를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움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그는 시카고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토슈즈를 벗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춤을 선보였다. 당시 기계적인 기교 중심의 발레만을 접했던 관객들은 그의 파격적인 모습에 조소를 보냈다.
전통 발레만 인정하는 조국에 실망한 이사도라는 곧바로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이제껏 무용에 쓰이지 않았던 베토벤·바그너·쇼팽 등의 음악을 과감히 사용한 무용을 선보였다. 또한 과도하게 조이는 무대 의상과 기계적 테크닉으로부터의 강박에서 벗어난 내적 표현을 추구했다. 기성적인 표현 기교를 답습하는 대신 기법과 표현 자체에도 개인의 창의성을 주장하며 그간 한정된 소수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무용을 대중화하는 길을 개척했다.
그렇게 1902년 유럽에서 선보인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성공 가도에 올라탔다. 러시아에서 초청 공연을 열고 독일과 프랑스에 무용학교를 건립했다. 특히 독일은 발레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이를 진작시키기 위한 사회적 운동이 활발했는데, 이사도라는 이에 큰 영향을 주고 독일 신무용의 탄생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그가 오늘날 현대 무용의 선구자로 불리는 배경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고난도 적지 않았다. 나체에 가까운 의상으로 인해 천박한 여성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소련에서의 활동 때문에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내 몸의 일부가 노출되는 것을 왜 조심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며 청교도주의의 속박과 편협한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신체를 숨기는 것이 외설적인 것이다.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이다.”
이후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던 이사도라는 1927년에 니스 해변에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인해 향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안녕, 여러분. 전 영광을 향해 갑니다!(Adieu, mes amis, Je vais à la gloire!)’라는 유언은 마지막까지 자유분방했던 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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