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스커리어=최영하 기자] 영화·드라마·서적·시·노래 등의 콘텐츠 속에 숨어 있는 여성 이슈를 살펴보고 시사점을 도출해나갈 계획이다. 단순한 작품 소개를 넘어 그 안에 담긴 핵심적인 내용과 장면을 통해 여성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조망한다.
# 오로지 실력 하나로 인종·성차별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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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든 피겨스 포스터[사진=네이버 영화] |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근절되지 못한 악질적인 유산이다. 하물며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정도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한 가지 차별만으로도 사람이 고통받기에 충분하건만 두 가지를 동시에 겪어야 했던 '흑인 여성'들이 60년 전에 존재했다. 이들이 오로지 실력 하나로 차별과 억압을 보란 듯이 극복해낸 아름다운 서사는 이제야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큰 감동과 통쾌함을 선사한다. 2016년작 히든 피겨스 이야기다.
히든 피겨스는 1962년 머큐리 계획 당시 미항공우주국 나사(NASA)에서 일했던 흑인 여성들의 실화를 담은 마고 리 셰털리의 저서 '히든 피겨스: 미국의 우주 경쟁을 승리로 이끈,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당시 나사에서 근무한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W.잭슨까지 3명의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나사의 각 부서에서 인간 컴퓨터인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갖가지 차별과 맞닥뜨리게 된다.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 출신으로 해석기하학에 능했던 캐서린은 STG의 계산 검토원으로 발령을 받지만 다른 직원들의 무시 속에 일한다. 커피를 끓이는 공용 커피포트를 그가 사용하면 다른 직원들로부터 황당하다는 눈초리를 받았고,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800m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도로시는 나사 유색인종 계산팀의 리더로, 사실상 매니저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유색인종은 정규직 매니저가 될 수 없다는 나사 내부 방침에 따라 임시직에 머물러 있다. 계산팀에서 일하는 메리는 능력이 충분했으나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엔지니어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버지니아 대학교 혹은 햄프턴 고등학교에서의 수강 이력이 조건이었지만, 정작 그 두 학교는 흑인의 입학을 받지 않는 곳이었다.
이처럼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당시에는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 여성은 그 같은 거대한 차별을 결코 굴복하거나 스스로 포기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캐서린은 뛰어난 능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차별에 맞서 잘못된 점을 끊임없이 공론화하려 노력했다. 이에 윗선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프렌드쉽 7호의 궤도 계산 및 재진입 지점, 회수 좌표 계산이라는 중대 임무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낸다. 그는 IBM 컴퓨터의 도입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잃었으나, IBM의 계산 오류가 발생하면서 급히 호출을 받는다. 다시 돌아온 그는 발사 직전 최종 좌표를 정확하게 계산해 내면서 프렌드쉽 7호의 성공적인 궤도 비행을 이끌고, 이후 아폴로 11호 발사 프로젝트까지 참여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컴퓨터를 습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은 도로시는 IBM 7090과 포트란을 독학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나사 직원과 IBM 파견 직원까지 쩔쩔매던 시스템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뿐만 아니라 해고 위기에 처한 다른 계산팀 소속 흑인 여성들까지 독려해 나사가 필요로 하는 IBM 전담 프로그래밍과 펀치카드 작성 전문 직원으로 전원 배치되는 쾌거를 이끈다. 능력을 인정받은 도로시는 나사 최초로 흑인 매니저가 된다.
학위 때문에 꿈이 가로막혔던 메리는 법원에 정식으로 소송을 걸어 승소함으로써 나사 엔지니어 육성 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항공 엔지니어가 됐고, 이후 나사 여성 훈련 담당관에 오른다.
캐서린·도로시·메리는 자신의 삶에서만 차별의 극복과 성공을 이룬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항공 우주 개발 연구뿐만 아니라 걸스카우트 등 지역 내 자원 봉사와 전국 흑인 진로 특강 등에 적극 나서면서 인종 차별과 성차별 철폐에 앞장섰다. 또한 흑인 학생이나 여학생의 참여를 제한하던 대회에 자녀들을 참석시키는 등 직장 밖에서도 차별 철폐에 앞장섰다. 세 사람 모두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만드는 것을 굉장히 중시했다. 이 같은 결과로 2019년에 이르러 나사 앞 거리의 이름은 '히든 피겨스 웨이'로 명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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