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엄마의 강
류인채 시인
2080moon@hanmail.net | 2024-04-11 14:10:42
[맘스커리어 = 류인채 시인] 몇 년 전 친정엄마가 폐암 수술을 받으셨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대동맥과 척추 바로 옆쪽에 숨었던 악성 종양이 발견되어 제거하는데 수술 시간이 길어져서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나고 마취가 깰 무렵 면회가 허용되어 자식들이 급히 중환자실로 갔다. 엄마는 코와 가슴 세 곳에 호수를 줄줄이 매달고 알몸으로 담요 하나만 걸치고 누워있었다. 나와 남동생이 동시에 “엄마!” 하고 부르자 초점 없는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였다. 순간 몸을 빠져나갔던 정신이 막 돌아온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보시더니, “아퍼, 아퍼, 추워, 추워…….” 신음을 토했다.
“엄마, 나 인채야!” “인만이야!” 우리가 엄마를 간절히 불러도 동문서답처럼 앞이 안 보인다고만 하셨다. 엄마의 차디찬 몸을 내 몸으로 감싸 안으며 귀에 바짝 입을 대고, “엄마, 많이 아팠지? 이젠 다 됐대. 나쁜 것 다 떼버렸대.”라고 말씀드리자 그제야 “나 살았대? 너 인채니?” 하시더니 병실이 떠나갈 듯 우셨다.
“엄니, 아퍼! 아퍼! 엄니, 아퍼!…….”
여든다섯 살 엄마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진 다섯 살 아이처럼 엄마의 엄니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간 큰딸을 늘 안쓰러워하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엄마가 울자 자식들도 울었다.
속울음을 우는 엄마의 모습은 가끔 보았어도 그렇게 큰 소리로 우는 울음은 그날 처음 들었다. 대체 강하게만 보이던 엄마의 그 어디에 울음이 저장되어 있었을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엄마의 일생을 쓴 두꺼운 책이 어지럽게 펼쳐지자 어느 행간에 응축된 고통과 서러움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때 그 눈물을 닦아줄 사람은 오직 엄마의 ‘엄니’뿐이었다.
한사코 폐암 수술을 받지 않겠다던 친정엄마가 수술실로 옮겨졌다, 기다리는 내내 시간은 멀리서 총성이 울린 뒤의 고요 같았다 수술이 끝나자 코와 가슴에 줄줄이 호스를 매달고 얇은 담요 한 장 걸친 가냘픈 몸, “엄마!” 자식들이 부르자 빠져나갔던 정신이 순간 돌아온 것처럼 멍한 표정 “앞이 안 보여야! 나 지금 살은 겨?” 자식들 이름을 더듬더듬 부르더니 병실이 떠나갈 듯 우신다
“ 엄니! 나 아퍼! 아퍼!……”
엄마가 엄니를 찾으며 여든다섯의 엄마가 통곡한다
잘리고 남은 폐로 거칠게 숨을 쉬며 아이처럼 펑펑 운다
저 울음은 노을에 젖은 산기슭 콩밭을 매고 돌아와 초저녁 한때를 흔들던 다듬이질 소리다
사흘 굶고 고무 대야 가득 연시를 담아 이고 지친 걸음으로 타박타박 은산장으로 적곡장으로 떠돌던 발걸음 소리다
검불 같은 당신의 빈 가슴에서
오늘 살아있음에 대한 하울링이 강물처럼 흘러 침상을 띄운다
‘엄니’라는 이름은 바위만큼 무거워
울음이 울음을 낳고
육 남매가 젖어간다
파리하니 차가워진 이마
어느새 엄마의 엄니가 와서 어르고 가셨는지
울음을 뚝 그친다
울다가 다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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