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스커리어=최영하 기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적 순간에 존재감을 보였던 여성을 조명합니다. 시대의 억압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놨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사례들을 소개하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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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사진=public domain] |
우리는 노예 해방과 민주주의 발전사에 대해 대체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성이 기본권인 참정권을 얻기 위해 지난한 투쟁 속에 피를 흘려온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대표적인 선진국 중 하나인 영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피로 물든 역사의 중심에는 에멀린 팽크허스트라는 여인이 있었다.
에멀린은 1858년 7월 15일 영국 맨체스터 모스 사이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은 정치적으로 인권과 평등을 중시하는 급진주의 가정이었고, 어린 시절 사랑이 넘치고 유복한 분위기 속에 성장했다.
그녀의 부모는 시대를 앞서간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딸의 교육이나 여성의 정치적 참여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19세기 말 당시 영국에서 여성 교육의 초점은 '집을 매력적인 공간으로 꾸미는' 기술을 배우는 수준에 맞춰져 있었다.
에멀린은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지하는 조력자인 변호사 리처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해 세명의 딸 크리스타벨·실비아·아델라를 낳았다. 그녀는 빈민구제위원회와 교육위원회 등 지자체에서 일했는데, 이곳에서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의 불공평함과 여성의 정치적인 지위가 낮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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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앞에서 연설중인 에멀린.[사진=public domain] |
결국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합을 설립해 독자적인 여성 참정권 운동을 시작했고, 그녀의 조직은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영국은 노동계급의 보통선거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에멀린은 남성들이 누리는 것만큼의 권리를 여성들에게도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과거 농장 노동자들이 건초더미를 불태우는 등 강경 시위를 통해 투표권을 얻어낸 것에 영감을 받아 남성들이 만든 법에 과격한 무력 저항을 시도했다. 즉각적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가두시위와 연설, 단식투쟁부터 방화, 건물 파손까지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성들은 왕실이 자신들을 볼 수 있도록 버킹엄궁 난간에 몸을 매달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남성들의 전유물인 골프장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에멀린은 1908년 세 차례에 걸쳐 체포돼 투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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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모습을 담은 당시 신문기사.[사진=public domain] |
에멀린이 이끈 급진적 운동의 영향으로 영국 정부는 결국 1918년부터 30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가했다. 그러나 남녀 공히 동등한 투표권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2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정됐다. 일생 동안 '남성과 평등한'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해 애쓴 에멀린은 법안이 통과된 지 불과 몇 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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