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여성들] 비행사의 꿈을 이룬 '권기옥'
[맘스커리어=최영하 기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중대한 순간에 존재감을 보였던 여성을 조명합니다. 시대의 억압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놨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사례들을 소개하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한국 최초 여자 비행사로 이름을 올리다
▲여성 파일럿 권기옥[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권기옥은 1901년 1월 11일 평양에서 1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첫째에 이어 둘째인 그 역시 딸로 태어나자 대놓고 아쉬움을 나타낼 정도로 그는 여성차별이 심한 시대의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은 원래 풍족했으나 도박에 빠진 부친 때문에 가세가 크게 기울면서 권기옥은 11살의 나이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했으며, 학교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언니의 책으로 글자 공부를 해야 했다. 다행히 12살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소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졸업 후에는 중고교 통합인 숭의여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7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비행사의 꿈을 꾸게 된다. 평양 상공에서 미국인인 아트 스미스가 곡예비행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것이다.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처음 보자마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마음먹었다.
이후 졸업반이 된 권기옥은 교사 박현숙의 권유로 비밀조직인 송죽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처음 발을 들였다. 때마침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벌어지면서 그는 태극기를 만들어 거리에 나섰다가 체포돼 3주 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채 판매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복역하기도 했다.
풀려난 뒤에는 광복군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도우면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비밀 공작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몸을 담았다.
상하이 망명 4년 차인 1923년에는 임시정부 내부 결정에 따라 중국 항공학교 입교를 시도한다. 하지만 여성차별이 팽배했던 관계로 몇 곳에서 퇴짜를 맞은 뒤 결국 윈난 육군항공학교의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상하이에서 홍콩, 하이난, 베트남 하노이를 거치는 먼 길을 감내해야 했다.
비행사 자격을 취득한 권기옥은 장군 펑위샹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 국민당 공군에 소속돼 일본군과 싸웠고,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과 교류하기도 했다.
일제의 심장부인 일본 본토에 폭격을 가하는 것이 권기옥의 꿈이었으나 중국 내부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이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1937년 임시정부 청사가 마지막으로 머문 충칭으로 몸을 옮겨 중국 국민당 정부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충칭 임정 산하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광복 후 1949년에 귀국했다.
2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약하며 공군 창설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다. 또한 출판사를 열어 책을 출간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배움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대통령 표창과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그렇게 권기옥은 장충동의 낡은 목조 건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 4월 19일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둔 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순종을 강요받던 시대에 비행사를 꿈꾼 여성이었다. 남성 비율이 99% 이상이었던 비행기 조종에 도전해 노력한 결과 최초 한국인 여성 비행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가 맞서서 끝내 극복해낸 것은 일제의 탄압 그리고 시대의 차별과 편견이었다.
[ⓒ 맘스커리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