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맘스커리어=최영하 기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중대한 순간에 존재감을 보였던 여성을 조명합니다. 시대의 억압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놨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사례들을 소개하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근대 간호학 정립에 인생을 바친 위대한 여성
![]()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사진=wikiwand] |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간호사로서 헌신해야 할 윤리·간호 원칙이 담긴 ‘나이팅게일 선서’다. 전 세계의 간호사들은 자신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시점에 이를 낭독하고 정체성을 되새기게 된다. 선서의 토대가 된 인물이 바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헌신의 이미지로만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 그는 근대 간호학의 정립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위대한 여성이었다.
나이팅게일은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영국 상류층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3년 동안 세계를 누비는 신혼여행 중에 출산했고, 국적은 영국이지만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청소년기를 거치며 병들고 다친 이들을 돌보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신앙적 사명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이 실제 간호사가 되기까지는 엄청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당시 간호사의 사회적 지위는 무척이나 낮았다. 전문적인 직업이라기보단 병원과 요양원에서 잡다한 일을 도맡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거나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여성들이 간호사를 직업으로 선택하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의사조차도 지금과 같은 촉망 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다.
나이팅게일의 집안은 상당한 명문가에 아버지는 정치인으로서 주지사 선거에도 나갈 정도의 지역 유지였다. 그랬기에 나이팅게일이 사회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하자 집안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를 막고자 억지로 혼사를 수차례 추진했으나 나이팅게일은 이를 번번이 거절했다. 심지어 귀족 출신의 한 젊은 정치인은 무려 9년을 구혼했지만 그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나이팅게일은 자신이 꿈에 바라던 간호사가 된다. 그리고 때마침 크림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 간호사로 참전한다. 의료 기술이 지금보다 떨어지던 당시에는 전장에서 즉사하는 이들보다 부상을 입은 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감염 등으로 사망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이 같은 문제를 파악한 나이팅게일은 군 내의 위생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활동하면서 동시에 이를 개선하기 위한 지원을 본국에 요청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직접 각종 통계자료를 만들고 호소하며 끝내는 지원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이 덕분에 영국군 부상자의 사망률은 40%대에서 2%까지 극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우리에겐 다소 성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사실 전장에서의 나이팅게일은 투사에 더 가까웠다. 자신을 몸을 아끼지 않고 밤낮없이 환자를 돌보면서도 군에서 필요한 물자를 내주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군창고로 쳐들어가 가져오거나, 자신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포기할 때까지 논쟁을 계속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숨기지 않았다.
종전 이후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간호 철학을 토대로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최초의 근대식 간호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철학은 쾌적함을 느끼는 환경에서 환자의 회복이 더 빠르고 간호사는 환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세운 간호학교는 간호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 간호교육을 비종교적인 배경에서 학문적 차원에서 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서 간호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했고, 세계 최초로 독립적으로 운영된 기금으로 학교를 세움으로써 간호학의 독립성을 구축했다.
이곳에서 나이팅게일은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 거리, 간호사 1명당 담당하는 최대 환자의 수 등 병원의 수익 문제로 그간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개선해 나갔다. 사회적 명망을 얻으면서 정치권에서도 그를 주목했고, 영국에서 1911년에 실시되는 국민보험법과 1946년 시행된 전 국민 의료복지의 선구적 조치의 토대가 마련되는 계기가 됐다.
[ⓒ 맘스커리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