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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예인이자 작가 이정수 |
[맘스커리어=이정수 작가] 한 방송에서 연기자 선배님을 만났다. 내 기억에 그분과 함께 방송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좀 가물가물했다. 그러다 탁하고 떠오른 것이 사랑과 전쟁이었다. 그래서 선배님에게 “선배님! 예전에 저랑 사랑과 전쟁하셨죠?”라고 물으니 약간 정색을 하시며, 본인은 “그런” 프로그램을 한 적이 없다고 하시는 거다.
난 이 어감의 의미를 안다. 사랑과 전쟁의 출연한 배우들 중에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 친한 최영완, 민지영은 내가 같이 연기해 본 여배우 중에 가장 연기를 잘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나의 경험치 안에서 말이다) 한데 이들에겐 “사랑과 전쟁” 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게 배우로서의 일종의 걸림돌이 됐다. 연기력과 무관한 유리벽이 생긴 거다.
나 역시 비슷하다. 아니 난 오히려 더 했다. 코미디언이라는 타이틀이 한 장의 벽을 더 추가했다. 당시만 해도 내가 그 유리벽을 넘을 연기력을 갖지 못함을 탓했지만 그래도 유리벽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관계자들이 내게 사랑과 전쟁 이야기를 하면 움츠러들고 피하고 싶었다. 이게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도 같은 게, 강연하러 가서 내 프로필을 소개해 주시는 분들이 종종 사랑과 전쟁을 넣을지 말지를 묻곤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방송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개그콘서트와 사랑과 전쟁인데, 어쩌란 말인가? 지울 수 없다. 내 인생의 한 부분이다. 남들은 이미 그리 알고 있고, 나만 인정하면 되는데 못 할 게 뭐 있나? 지금은 다 인정했다. 그래서 지금 사랑과 전쟁을 넣을지 말지 물어보면, 내 대답은 늘 같다.
“편한 대로 하세요. 저는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이젠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강연 중에 내가 사랑과 전쟁에서 했던 역할로 농담을 하기도 한다. 내가 했던 역할이 마마보이, 처가댁 등 처먹는 사위, 아내 등 처먹는 남편. 그중에 베스트 찌질이는 이혼을 결심하고 짐을 싸서 나왔는데, 아내가 로또에 맞은 것을 알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남편이었다. 이렇게 피하고 싶던 것이 농담으로 승화되는 과정에는 아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했었다.
예전에 1박 2일에서 이수근(형)이 소리 없는 방귀를 뀐 적이 있었다. 다들 알겠지만 소리가 없다는 것은 냄새가 있다는 것이다. 다들 누가 뀐 것인지 찾았고, 이수근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다. 그 후 이수근은 방송 중 자유롭고 편하게 방귀도 뀌고, 웃음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코미디언들이 이런 인정을 잘하는 편이다. 요즘 세상에 이혼이 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곱지 않았을 당시에 그것을 방송에서 가장 먼저 쿨하게 인정한 사람들이 코미디언들이었다. 그 후부터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농담처럼 넘어가는 분위기도 형성됐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척’한다. 척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며 일종의 연기다. 보여 주고 싶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거다. 대인관계를 잘하는 척, 부자인 척, 아는 척, 겁먹지 않은 척, 즐거운 척. 내 삶인데도 연기를 하며 자유롭지 못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가? 예능 같은 프로그램에선 어떤 류의 출연자가 오래 살아남냐면, 실제로 캐릭터가 특이하고, 그걸 과감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는다. 자신이 특이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방송이라고 어떤 설정을 잡고 행동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시청자는 불편해진다. 출연자가 실제 편해야 시청자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냥 나를 보여줘도 괜찮다. 우리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대로 보여주다 보면 점점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간다. 인정이 우릴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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